로버트 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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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9월 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 군무원으로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김(한국명:김채곤)이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국가기밀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FBI(미연방수사국)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미국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 시민권자인 로버트 김이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국가의 기밀을 빼돌려 母國에 넘겨줌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미 외교관계, 남북한,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 로버트 김 개인적인 불운까지 겹쳐 사뭇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NASA 거쳐 미 해군정보국 근무

그는 미국 유학 4년 만인 1970년, 31세 때 NASA에 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NASA에 최정예 과학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시민권이 없는 외국의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그것이 로버트 김이 NASA에 들어가게 된 배경이다.
4년 후인 1974년에 MITRE CORP.에서 교통관련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근무하려면 시민권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1974년에 시민권을 획득하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78년부터 미 해군정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단돈 50달러를 갖고 떠난 미국 유학길,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끝에 그는 4년만에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우주과학연구원으로 일했고, 12년 만에는 군사기밀을 다루는 유능한 정보분석관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로버트 김의 해군 정보국에서의 직명은 컴퓨터 정보분석관(Computer Specialist)으로 미군 정부 컴퓨터 시스템인 JMIE(Joint Maritime Information Element)의 디자인, 개발, 그리고 유지에 대한 기술적인 관리를 맡고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의 국가 특급 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해군정보국 1200여명 직원 중 유일한 동양계로 그가 근무할 당시 필리핀계 직원이 한명 있었지만, 그는 미국 태생이었다. 아웃소싱 예산에만 200만불 이상이 소요되는 큰 프로젝트를 관리할 정도로 그는 해군정보국 내에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승진과 수상 경력도 많았으며, 체포 당시에도 승진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기밀을 다루다 보니 해군정보국의 직원채용 기준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이력서를 접수받고도 1년 이상의 철저한 신원조회를 거친 뒤에야 채용할 정도이다. 그리고 채용된 후 1년 이상 되어야 1급 정보를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국가 1급 정보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사회에서 그 신용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워싱턴 한인감리교회의 장로로 주변의 신망이 두터웠다.

미국사회에서 재소자가 된다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에서 재소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불이익과 편견을 감수해야 한다. 특히나 로버트 김처럼 화이트 칼라에서 하루 아침에 재소자가 되면 일평생 쌓아온 명예와 신망,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로버트 김은 모든 수입이 끊어졌고, 은행 거래도 중지되어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에 처해있다.
안정된 생활과 사회적인 지위, 조국을 떠난 지 37년이나 되는 그로서는 미국 시민으로 편안하게 살수도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이 꼭 알아야 함에도 공유하지 못하는 정보들을 제공했고, 그로 인해 ‘기밀수집’이라는 죄목으로 미국 사회에서 스파이 취급을 받으며 수감되어 있다.

스파이라고 함은 미국과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자이다. 또한 미국의 한인들은 그로 인해 자신들이 불이익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되도록 이 사건이 빨리 해결, 내지는 잊혀지기를 원했다. 결국 로버트 김은 자신이 도우려고 했던 조국,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신을 이해해줘야 하는 한인들에게서도 외면 당하는 두 번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한국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정보들이었다.

로버트 김은 “미국은 한국의 우방이니 맹방이니 하지만, 실제로 한국에 중요한 정보를 나눠주지 않는다. 영국이나 캐나다 등에는 제공하는 한반도 관련 정보를 한국에는 제공하지 않은 적도 있다. 나는 정보가 공유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한국이 꼭 알아야 하는 정보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를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한 우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네 나라 외에는 어떤 나라도 미국에 대해 등을 돌리고, 미국의 국익에 맞서거나 혹은 적어도 그럴 소지를 늘 갖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듯 미국과의 중요한 정보공유 체제에서 밀려나있던 한국의 상황은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로버트 김에게는 안타깝게 느껴졌고, 한국 관련 정보를 제공해달라는 백동일 대령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로버트 김이 백동일 대령에게 전달한 정보들은 한국군과 한국정부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동요 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북한군에 유입되었는지의 여부, 휴전선 부근의 북한군 배치 실태, 북한이 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무기현황, 북한해군의 동향, 북한 주민의 탈북실태 등 우리 軍이나 정부가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백동일 대령은 “김 선생이 보내준 자료에는 야, 소리가 나올 정도로 좋은 정보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 FBI가 도청한 두 사람의 전화통화 내용에도 “김 선생님이 보내준 노란 봉투를 편지함에서 꺼내보았을 때 내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료들을 참고하여 보고한 것으로 인해 본부로부터 많은 격려와 칭찬을 받았다”면서 백대령이 고마워하는 부분이 있다. 이 증거로 인해 로버트 김에게는 ‘정보수집죄’에다가 ‘공모죄’까지 덧붙여졌지만, 한국 정부가 그를 통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았다는 것이 다시 한번 밝혀진 셈이다.

조국을 돕겠다는 순수한 동기, 정보제공으로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로버트 김은 정보를 직접 전달받은 백 대령은 물론 한국정부로부터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백 대령의 증언에 의하면 고마움의 표시로 몇 차례 식사 초대를 했지만, 그 때마다 선약이 있다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 정중하게 거절했고, 쉐라톤 호텔에서 한국에서 온 해군정보장교들과 만났을 때에는 백대령이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섰다고 한다.

그 후 딱 한번 로버트 김을 접대한 적이 있는데, 그가 FBI에 체포되기 며칠 전인 1996년 9월 초, 한국에서 연수차 미국에 온 제독 두 사람을 로버트 김에게 소개시키게 되어 워싱턴 DC 근교에 있는 미 육군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이 로버트 김이 받은 접대의 전부였다.
이전 정권에서 로버트 김 사건을 “우리와는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 “미국의 사법당국에 넘어간 이상 미국 법 집행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방관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정보제공의 순수성과 그 정보의 중요성으로 볼 때 한국 정부로서는 책임을 회피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체스넛 검사는 최후 논고에서 “로버트 김은 그의 고용주인 해군 정보국은 물론 미 합중국의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책임을 저버리고, 타국(한국)에 대한 사랑을 택했다”고 말하였다. 로버트 김은 한국에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기밀을 수집하고, 마치 미국의 안보를 해친 중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그의 희생에 대해 우리는 결코 방관할 수 없다.

로버트 김은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고, 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